군대에서 군수(쉽게 말해 보급)를 담당했던 나는 군수 물품 중의 하나인 소화기도 관리해야만 했다.
내가 있던 부대는 사단 내의 예하부대에게 보급을 해주는 부대였기 때문에 큰 창고가
여러개 있어 그 창고 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빨간색의 소화기가 있었다.
그리고 탄약고, 유류고, 막사 등에도 소화기가 있어 약 30개 정도의 소화기를
리스트까지 만들어 관리를 했다.
그런데 그 30여개의 소화기 중 도저히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를 소화기가 하나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소화기였다.

바로 이 소화기..
본 적 있으십니까?
분명 소화기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부대 내에 있던 사람 중, 간부를 포함하여,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어느날 소화기 정비를 담당했던 정비대에 가서 사용법을 물어봐도
그냥 미국 소화기 중에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를 할 뿐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혹자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가운데에 떡하니 'INSTRUCTION'이라고,
친절하게 그림까지 덧붙여서, 써져있는데 어떻게 사용법을 모를 수 있냐고 물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화기를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보통 소화기와는 다른 엄청난 무게,
한 손으로 왼쪽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느껴지는 그 육중한 무게,에 놀라 도저히
내가 이 소화기를 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된다.
누군가 어떻게 그 무게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그 다음은 더욱 난감하다.
왜냐하면 설명서 1번에 적힌 대로 본체의 오른쪽에 달려있는 검은색 통의
윗부분을 아무리 눌러봐도 별다른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나를 유혹하는 듯 'PUSH'라는 글자까지 각인되어 있건만
살짝 눌러봐도, 좀 힘을 주어서 꾸욱 눌러봐도, 손바닥으로 꽉 눌러봐도
이 놈의 소화기는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군대에서 이 소화기를 봤으니 소화기를 만지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군인.
이쯤하면 괜히 잘못 만졌다가는 그거되겠다 싶어 강한 호기심을 접고 만다.
이러한 이유들로 친했던 후임과 나는 이 소화기를 어느 순간 '맘모스 소화기'라고 불렀다.
2년간의 짧은 군생활 중 이 '맘모스 소화기'가 문제된 적이 한 번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은 내가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다쳐 군병원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벌어졌다.
우선 내가 병원으로 실려가기 얼마 전 창고 지역에 있는 소화기를 점검한다고 해서
행정보급관과 나는 왠지 저 알 수 없는 소화기가 점검관의 눈에 띈다면 무슨 일이라도
발생할 것 같아 급한대로 탄약고 앞에 있던 소화기와 자리를 맞바꾸었다.
다행히 점검은 무사히 넘어갔고 맘모스 소화기는 그 날부터 그 중요한 탄약고를 지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나는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었고 퇴원을 하고 업무에 복귀하여 한 달에
한번 하는 탄약고 점검을 갔다 어느새 우리의 맘모스 소화기가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어찌된 일인가 싶어 내가 없는 동안 내 일을 대신했던 후임(앞서 나온 그 후임)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후임은 웃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하, 형!
그 맘모스 소화기 때문에 좆될뻔 했어!
내용인 즉슨 이렇다.
내가 병원을 가기 조금 전 마침 사단장이 바뀌어 한 달에 한번하는 탄약고 점검 때 사단장이 오게 되었다.
또 마침 탄약고를 담당하는 행정보급관은 교육으로 그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별 일 아닌 것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유명한 방상사가 대리 업무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마침 탄약고를 담당하는 병은 중요한 부위가 다쳐 그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주특기가 '군화 수리병(주특기번호 2122)'이었던 그 후임(참고로 그는 주특기가 무색하게 군생활
동안 단 2개의 전투화, 그와 내 전투화 뒷굽을 수리했을 뿐이다)이 대리 업무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사단장이 와서 탄약고를 순찰하는데 주변에 누군가가 저 소화기는 무어냐고 물었나 보다.
순간 그도 태어나서 처음보는 것이 분명할 이상한 소화기를 보고
당황한 방상사는 그의 버릇대로 말을 더듬으며
그, 그, 그게, 소, 소화기, 소화기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질문한 사람은 당연히
이 소화기는 미국 앤슐사(社)의 소화기로서 내부에 가스가 차있는 일반 소화기와는 달리
여기있는 푸쉬버튼을 누르면 탄산가스가 터져나와 분사할 수가 있는 용량이 큰 소화기입니다.
와 같이 전문적인 대답을 듣기 원했을 것이기 때문에 방상사는 핀잔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무사히 탄약고 점검을 끝마쳤으나 그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방상사가 그러한 수모를 견뎌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대체 창고 지역에 있던 우리의 맘모스 소화기가 왜 탄약고에
와 있는지는 꿈에도 알지 못하는 내 후임에게 이렇게 폭언을 했단다.
이, 쒸, 쒸, 쒸팔.
이 병신같은 소화기, 소화기는 뭐, 뭐야!!
니, 니, 니가 갖다 놨어?
갖다 놨으면 이, 이, 이런게 있다고
말, 말을 미리 해야할 거 아니야!!
이 개, 개세끼..
행, 행정관도 개세끼같으니라고
가기 전에 이런거 있다고 말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러한 이유로 다시 맘모스 소화기는 창고 지역에 있던 소화기와 자리를 바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방상사가 그렇게 욕하지마다 않던 행정관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지
병원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있어 정비대에서 이 소화기를 바꿔주겠다며 들고 오라고 했다.
나는 낑낑대며 저 소화기를 들고 정비대에 가서 일반 소화기와 바꿀 수 있었다.
사용법은 몰랐지만 그래도 다시는 저런 소화기를 볼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 섭섭함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는 저런 소화기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공장에 내려오자 마자 실시한 소방교육에서 저 맘모스 소화기를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맘모스 소화기라고 부르던 그 놈을 Ansul(앤슐) 소화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사용법은 물론이거니와 작동원리까지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사용법은 당연히 그 PUSH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인데,
버튼을 아주 힘차게, 주먹으로 아주 힘차게 내리 눌러야만 눌려지는 것이었다.
버튼이 눌러지면 그 속에 숨어있던 탄산가스통에 구멍이 뚤리며
소화기 본체에 있는 소화제와 섞여 호스 끝에 달린 손잡으를 누르면
드디어 발사가 되는 것이다.

보아라 맘모스 소화기의 웅장한 모습을!
양키마저 무거워서 낑낑대고 있구나!!
소화기 하나에 40~50만원은 한다는 우리의 맘모스 소화기.
평생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하루에도 20번은 보는 것 같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그 동생과, 호들갑 떠는 방상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에는 친절하게 사용방법을 알려줘야지.